큐레이터의 단상
대림미술관이 트렌디한 전시기법을 고수하는 몇 가지 이유
아르뜨
2016. 9. 14. 23:02
요즘 대림미술관의 전시기법이 각광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기존 미술관의 틀을 깬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과감하게 디자이너 출신들을 큐레이터로 영입해서 미술사, 미술이론을 전공한 사람들에 비해 창의적인 생각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예전에 우연한 기회에 대림미술관 큐레이터로 언론에 나온 사람들의 논문을 찾아본 적이 있지만 학예사라면 응당 해왔을 학계에 발표한 논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학문 연구보다는 대중이 향유하고 싶어하는 트렌드 연구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골치아픈 미술사보다는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트렌드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전시를 통해 펼쳐보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미술관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사회적 의무에 소홀하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미술관은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미술이라는 장르를 선보일 의무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미술사, 미술이론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문제제기와 연구활동도 병행해야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림미술관은 현명하게도(?)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하나에만 집중해서 성공적으로 운영해나가고 있다. 마치 전설처럼 전해지는 옛 광고인의 PT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광고주들은 내가 직접 경험해본 바도 요즘 SNS에서 풍자되어 다들 잘 알고 있듯이 15초라는 짧은 TV광고 혹은 한 페이지에 불과한 지면 광고 하나에 제품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담고 싶어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90년대에 활동한 유명한 광고AE가 있었는데 그 분이 PT를 하다가 광고주 쪽에서 이런저런 주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 AE는 준비해 온 테니스 공을 하나 던져주며 받아보라고 했고, 광고주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 공을 잡았다. 다시 AE는 테니스 공 여러 개를 한꺼번에 던져주며 잡아보라고 했고 광고주는 그 중 하나도 제대로 못잡았다. 한번에 여러 개의 공이 날아오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AE는 광고는 이것과 같다며 광고 하나에 메시지 하나만 던져야 소비자가 잘 기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광고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며 광고, 마케팅의 기본 이론으로까지 대우받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아마 이같은 마인드로 경복궁 옆 골목에 쳐박혀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미술관을 성장시킬 전략을 짰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디자이너, 사진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관람객에게 친절한 설명없이 감각에만 치우친 전시기법을 선보이는 이유로 소장품의 빈약함을 들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명 국공립미술관 및 사립박물관들에 비해 소위 국보급이라 할만한 소장품이 없는 대림미술관으로선 이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대림미술관이 다수 소장하고 있는 사진작품과 같은 근현대 작품들은 시기상의 이유 때문에 아직 국보급이 되기는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작품의 체계적인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전시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일례로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과 파리의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이 두 미술관을 모두 가본 사람들은 서로 왠지 컨셉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은 전시공간 내에 텍스트가 적으며, 관람객들이 현대미술의 흐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연대기적 전시기법보다는 작품의 주제, 정서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테마별 섹션 구분을 하고 있다. 즉 현재 대림미술관의 전시기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리의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은 입체주의가 시작된 1905년부터 전시공간이 시작되며 철저하게 연대기적 전시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 입장에선 현대미술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큐레이터가 본인을 부각시키기 위한 화려하고, 특이한 전시기법보다는 철저하게 관람객의 눈에 맞춘 연대기적 전시를 해야한다고 믿는 편이다. 어쨌든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은 이렇게 하고 있어 미술사 연구자로서, 큐레이터로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오르세미술관 역시 몇 년 전부터 전시공간을 재배치하여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연대기적 전시기법으로 바꾸었다.
런던과 파리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기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일까. 현대미술에 관한 각 도시별 풍토가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단순하게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이 분야에 몸담고 있거나 꿈꾸는 이들에겐 이 차이에 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소장품의 범위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은 연대기적 전시기법을 선보이기 힘들 정도로 파리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에 비해 소장품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림미술관이 그러하듯이 최선의 차선책으로 관람객의 정서, 다양한 시선에 집중한 테마별 전시기법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파리는 아주 자신있게 연도순으로 작품을 찬찬히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현대미술품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는 런던과 파리의 상속세 제도의 차이에도 기인한다. 프랑스는 바로크 이후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된 국가답게, 그리고 공식적으로 '미술관, 박물관'이라는 명칭을 지닌 기관을 모두 국립으로 운영하는 국가답게 많은 미술품의 확보를 위해 작품을 기증하는 것으로 상속세를 대체해주는 아주 나이스한 세금 제도를 갖고 있다. 즉 작가가 사망하면 2세들에게 작품을 물려주게 될텐데 이는 우리나라도 그렇고 많은 상속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상속받은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면 상속세를 그만큼 면제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금 제도를 프랑스어로 'dation(다씨옹)'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 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들이 많은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것이다. 세금 제도 하나만으로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관들의 전시기법의 차이까지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소장품의 양적, 질적 차이는 미술관 운영컨셉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대림미술관은 소장품이 빈약하다는 약점을 잘 인지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운영 전략을 잘 세운 사례로서 칭찬받을 만하다. 여기에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체계적인 작품 구입과 연구 활동까지 병행한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게 참 아쉽고 아직은 '그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그냥 문화공간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나는 발전 과정을 차분히 지켜봐줘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큐레이터는 무엇보다 학문 연구를 기반으로 해야한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박물관이 있으면, 저런 박물관도 있어야한다는 다양성의 존중 차원에서 대림미술관의 이러한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로선 아쉬움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