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단상

행복했던 전시실 지킴이 아르바이트 시절.

아르뜨 2015. 1. 22. 21:41


박물관 2층 전시실에 앉아있다. 2층 담당 경비 아저씨가 불가피한 일로 다른 곳에 계셔야해서 학예실 막내인 내가 대신 내려와있다. 앉아있어보니 대학원 다닐 때 인문학박물관에서 전시실 지킴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전시실 지킴이 아르바이트는 단어 그대로 전시실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게 생각만큼 쉽지 않아 전시실에 있는 근현대 사료들을 매일같이 구경하곤 했다. 아마 그곳에 있는 사료들은 전부 외울 정도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녹음한 노래도 들었고, 1960년대 늬우스도 시청했으며,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하이라이트도 수백 번 본 듯 하다.

어릴 때 미친듯이 좋아했던 포니1, 포니2, 스텔라 자동차가 서울 거리를 장악했던 1980년대 TV 자료를 보며 외출했다가 민주화 운동 시위와 마주치는 바람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채 최루탄을 피해 종로 골목으로 몸을 숨겼던 그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루는 어느 가게 주인이 최루탄을 피해 다니는 행인들과 함께 나와 내 어머니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해줘 몸을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머리에 흰 띠를 두른 대학생들이 쏜살같이 골목을 지나갔고, 이윽고 특유의 전투화 뜀박질 소리인 "두두두" 소리와 함께 전경들이 쫓아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나이에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도 있구나 라며 오로지 그 것 하나에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그 골목에 멍하니 있었으면 분명 사람들 발에 짓밟혔을 긴박했던 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당시에는 버스타고 종로, 광화문을 지나가다가 시위대만 만났다하면 최루탄이 터져 버스에서 도중에 내리는 일이 빈번했던 시절이었다. 의식있는 사람들의 이러한 고생 덕분에 몇 년 전까지는 개발도상국들에게 모범적인 민주주의 모델로까지 칭송을 받았던 우리나라였는데..

다시 전시실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전시실에 있으면서 또 기억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에서 사용한 일본어(당시엔 국어라 표기한) 교과서이다. 그 교과서를 보면서도 많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글을 쓰던 우리나라의 어린 학생들이 공식 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상황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괴리감이 있기나 했던 것인지, 아니면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겨 유유히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을지에 대한 상념이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당시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시대의 아픔이다. 그리고 다른 한 켠에 전시되어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고유섭 선생의 육필 원고를 보며 어쩜 그리 한자를 자유자재로 빠르고 멋있게 잘 쓰셨을까 라며 한참을 바라보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사료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수업 발표 준비를 할 때는 근무 시간 중에 읽어야 할 논문들을 전부 소화하기도 했다. 이런 근무 태만이 딱히 문제된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박물관에 찾아오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많아야 5명 정도? 어쨌든 10시부터 5시 반까지 홀로 전시실에 아무 말 없이 있어야해서 외로운 시간이 되었을 법도 하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책도 많이 읽고, 전시된 사료들을 나무 삼아 유유자적 산책하는 즐거움이 컸던 시간이었다. 마치 내가 역사의 한 현장에 와있는 것 같았고, 어릴 적 처음 역사책에 빠져들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행복했다.

이제 행정상 학생이 아닌 지금, 나는 정식 학예사가 되어 학예실에서 실무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책임도 더해졌으며,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사 과정 진학 같은. 안주하고 싶어도 안주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내 욕심 때문에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한 상태이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기억나지 않았던 전시실 지킴이를 할 때가 요즘들어 유독 그립고, 머리 속에 자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