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단상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에게
아르뜨
2012. 12. 26. 13:21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에게
아침부터 울리는 카톡 알림 소리와 함께 그동안 스터디를 했던 멤버들에게서 합격 소식을 전해들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지난 9월부터 준학예사 시험 대비 혹은 미술사 기초 지식을 위한 스터디를 진행해왔는데 함께 공부한 이들 모두 스터디 참여의 목적이 제각각이었다.
준학예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가운데 대학원 진학을 계획 중인 사람, 취미로 미술사 기초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 등등 목적은 저마다 달랐지만 미술사 공부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스터디에서 그동안 공부한 지식과 현장에서 얻은 정보,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모은 자료들을 주는 입장이었다.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나는 아직 '선생님'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에 '강의'가 아니라 '스터디'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나에 대한 호칭도 그냥 '아르뜨'라고 해주길 강요한다. 자료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유인물'이 아니라 '공유 자료'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반갑게 나를 부르며 대학원 입시와 준학예사 시험 합격 소식을 전하는 스터디 멤버들이 학교 직속 후배 같고, 친한 동생 같아 보이며 덩달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불현듯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지난 시간동안 굉장한 열기로 미술사 공부를 함께 한 스터디 멤버들의 순수하고, 진지한 열정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언론에서 '위기'라는 용어를 함부로 써가며 대졸자의 취업난을 알리는 기사를 가장 싫어한다. 지성의 전당이 되어야 할 대학의 모든 과가 마치 수익을 창출해야만 좋다라는 전제가 근간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리잡은건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은 끽해야 100년도 채 안되는데 마치 졸업해서 돈 많이 버는 직장에 취업해야지만이 올바른 사회구성원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진리라도 되는 양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술사는 시험이 무의미한 인문학이다.
미술사는 인문학이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처음 생겨날 때부터 지금까지 미술사학자들은 모두 인문학적 방법론을 통해 예술작품을 분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예의 경지란 무엇인가까지 고민하는 고차원의 학문이다. 나는 이렇게 배워왔다.
나는 올 한 해동안 자신이 계획한대로 이루지 못한(대학원 진학, 준학예사 시험 합격 등등) 이들에게 이러한 시각을 꼭 전해주고 싶다. 비록 요즘 사회가 라이센스를 요구하며 라이센스가 없다면 그 공부를 안한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인문학 공부는, 미술사 공부는 라이센스로 말할 수 없는 학문이라고 말이다.
흔히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위 사람들은 이런 조언을 해주곤 한다. "가늘고 길게만 가라"고 말이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서 별 신뢰를 느낄 수 없겠지만 이 말은 진리이다. 특히 인문학은 결코 천재가 존재할 수 없는 학문이며,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단기간에 수행하는 것처럼 짧고 굵직하게 할 수 없는 공부이다.
천천히,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책과 논문 읽는 양을 쌓아나가고, 자신의 생각을 서서히 정립해나가며, 그동안 공부한 자료들이 쌓이면서 빛을 발할 수 있는 학문이다. 미술사로 따지자면 그동안 모은 책, 논문, 도록, 도판 파일들로 인해 책장을 더 사게 되고, 용량이 아주 큰 외장 하드를 사게 될 때 쯤에 비로소 미술사를 어느 정도 공부했네라고 말 할 수 있는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단기간에 암기하는 능력이 뒤처지고, 서술형 시험 스타일이 몸에 익지 않아서 준학예사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들이 결코 실의에 빠지질 않았으면 좋겠다. 준학예사 시험은 사회에서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편리하게 검증하기 위해 도입된 시험일 뿐이지 미술사 공부의 수준을 절대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부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미술사책에 밑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공부한 사람들은 이제 미술사의 길에, 큐레이터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준비가 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시험 합격, 불합격으로 너무 들뜨지도 말고, 너무 우울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시험 합격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당신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공부에 더 정진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자신의 미래 계획을 꼭 길게 바라보고 쉽게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며 모두들 화이팅!